잡담

기분이 이상하다,

Zigeuner 2014. 10. 2. 00:03

라고 지난 포스팅의 마지막 문장을 끝맺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기분이 이상하다.

가장 최근 포스팅 두 개에서 연거푸 외할머니 이야기를 적었고, 이 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글 이후에 또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적게 될지는, 알 수 없다.



9월 22일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음력으로 1918년 1월에 집안의 맏이로 태어났다. 시집 가서는 시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동네에서 젤로 예뻤기 때문이다. 슬하에 네 남매를 두었고, 그 중 셋째가 우리 엄마다. 고향도 그곳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남편을 잃고 홀로 자녀들을 길러낸 곳은 목포에서도 배를 타고 한참 들어가는 장산도였다.


2011년에 찾았던 장산도


할머니는 유난히 꼼꼼한 일처리 탓에 밭일은 남들보다 느린 편이었다고 한다. 막내 시누였는지, 동네 이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일을 더 해서 할머니 양을 채워주고는 했던 모양이다. 밭일이 느린 대신 바느질 솜씨는 으뜸이어서, 동네에 바느질 거리가 있으면 도맡아 하셨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났을 막내 시누와 막내 동생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 (2011년)


남편을 잃은 후로 시누이들 사이에서 시집살이를 호되게 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막내 시누는 예외였다고 한다. 스물이 넘은 큰딸이 먼저 서울로 갔다가 온 가족을 서울로 불러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할머니의 환갑잔치가 있었을 것이다. 외가에서 앨범을 보다가 할머니 환갑 사진에서 부모님 품에 안겨있던 나를 발견했었지. 피둥피둥한 갓난 아기였다.


자라면서 줄곧 외가보다는 친가 친척들이 편했던 내게 외할머니 역시 그리 가까운 존재는 아니었다. 나이든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면  엄마 고생시킨다며 동생과 나를 자주 나무라셨고, 엄마는 엄마대로 왜 자기 새끼들을 나무라나 싶어 그 이후에는 할머니를 잘 모셔오지 않았다고... 이번에 그런 얘길 들었다. 5월쯤 작은 이모댁에 계시던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셔오려고 했을 때, 큰 이모도 할머니에게 '우리집으로 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처음엔 큰이모댁에 가시려던 할머니가 마음을 바꿔 큰이모에게 말하길, "셋째가 오라고 할 때 갈란다" 라고.


그렇게 우리집에 오신 할머니는 우리와 3개월을 함께 보냈다. 이전에 우리집에 계실 땐 내가 학교 혹은 직장을 다니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고, 앞서 적은대로 할머니가 잔소리를 하시는 통에 일부러 일을 만들어 귀가시간을 늦추곤 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야 친해지고 애틋해지는 법인데, 이전까지는 그럴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이번 3개월은 달랐다. 집에서 일을 하다보니 할머니 밥을 챙겨드리는 일도 많았고 얘기할 일도 많았고 관찰할 일도 많았다. 할머니랑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 시간들이 마지막 기회일 줄은 미처 몰랐다.


할머니의 소원은 잠결에 세상을 뜨는 것이었다. 돌아가시기 전날, 식사를 통 못하시는 할머니에게 영양제를 맞히려고 간호사를 불렀다고 한다. 간호사는 할머니에게 씹히는 음식 대신 미음을 드시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할머니는 거추장스럽다며 링거를 이내 뽑았다고 한다. 평소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외삼촌이 그날따라 팔다리도 주물러드리고 자정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를 봐드렸다. 그날 밤 할머니는 당신이 소원하던 대로 잠결에 저 세상으로 가셨다. 임종은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우리집에서 3개월을 지내고 추석을 쇠러 외가에 간지 보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빈소는 외가에서 가까운 병원에 차렸다. 전화를 받고 아빠와 나, 엄마가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울고 또 울었다. 영정 사진이 나오자 엄마는 또 울었다. 외가에서 미처 영정을 준비하지 못했던 건지, 영정사진 속 할머니가 지나치게 젊었다. 엄마가 젊었을 때 모시고 가 찍었던 사진이라고 했다. 사진 속 할머니는 50대의 모습이었다. 지금의 엄마보다도 훨씬 젊은. 엄마는 자기보다 젊은 모습을 한 할머니의 영정 앞에, 생전에 그리도 좋아하시던 뜨끈한 믹스 커피를 먼저 올려드렸다. 외사촌이 데리고 온, 이제 갓 돌을 지난 증손자가 뭘 아는지 할머니의 사진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바이바이.


발인을 하던 날은 원래 비가 쏟아진다는 예보가 있었다. 태풍 영향권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그날이 되니, 태풍은 빗겨가고 부슬비만 잠깐 내릴 뿐이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그 비를 보며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배려를 해주시나보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화장한 할머니 유골을 추모공원에 모셨다. 할머니 자리 옆으로는 평소 친하게 지냈다던 다른 고향 어르신들이 모셔져 있었다. 지금쯤 저분들이랑 인사하시느라 바쁘시겠지, 했다. 이틀 후, 삼우제 때 유골함 옆에 할머니의 십년 전 사진을 넣어드렸다. 자식들 품에 안겨 활짝 웃고 있는 할머니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 집에 계실 때 할머니는 소파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외가로 가기 전 할머니는 입고 있는 옷의 목둘레가 쳐져서 불편하다며 목둘레를 손수 수선했다. 내가 옆에 앉아 바늘귀에 실을 꿰어 드렸다. 텅 빈 소파를 볼 때마다, 거기 앉아 웅크리고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의 작디 작은 모습이 어른거린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도 할머니를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을 베풀어 주셔서 무척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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