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또, 할머니 이야기

Zigeuner 2014. 8. 2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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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목요일쯤이었다. 우리 엄마가 줄줄이 보는 아침드라마 시리즈 '모두 다 김치' '청담동 스캔들 '순금의 땅' 중 '순금의 땅'에서 순금이의 엄마가 죽었다. 백혈병인가 뭐 그런거. 나는 전날 늦게 잠든 탓에 늦잠을 거하게 자고 '순금의 땅'이 끝날 때 쯤 방에서 기어나와 할머니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손을 덥석 잡고 흔들며. 평소에는 "오냐, 너도 잘 잤냐" 로 대꾸하던 할머니였는데 그날 따라 '저그 테레비에서 젊은 사람이 죽었어. 육십도 안된거 같은데. 부럽다'라고 말씀하셔서 나를 놀래켰다. 타인의 죽음이 부러운 노년의 하루.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일주일 동안 누굴 만나건 할머니를 화제로 얘기했다. 할머니가 하루 동안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고, 이왕이면 할머니가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남은 생을 즐겁게 보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다 고대어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께서 지난 2주간 소록도에 봉사 다녀오셨다는 말씀을 듣게 됐다. 어제 점심을 먹으며 그 얘기를 전했다.


"할머니, 나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그거 문둥병(정식 명칭은 '한센병'입니다)이라고 알죠? 그 환자분들 있는 곳에 가서 봉사를 하고 오셨대요. 근데 그 분들이 귀도 잘 안들리고 몸이 아픈 와중에도 하루하루 살아있는 걸 너무 감사해하고 그렇게 순수하시더래. 그러니까 할머니도, 사람 죽는 거 보면서 '아이고, 부럽다' 하지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 보고  '아, 오늘도 안 죽고 살아서 좋구나' 하세요. 얼마나 좋아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잠시 내 얼굴을 보시더니 "고맙다" 하셨다. 밥알 뿜으면서 울뻔했다.


일단, 흥이라도 나시라고 TV를 끄면 뽕짝을 쿵짝쿵짝 집안이 울리도록 틀어놓는다. 관둬라 하지 않으시면 옆에서 책도 읽어드릴까 싶고, 할머니 옛날에 살던 얘기를 녹취해보라는 의견도 따라볼까 싶다.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고, 이런저런 기억을 쌓아둘까 싶은데, 생각해보니 이건 할머니보다 앞으로 남을 사람을 위한 작업인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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