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할머니와 지내는 나날

Zigeuner 2014. 8. 2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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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 엄마가 할머니의 몸무게를 쟀다. 31.8kg. 딱 봐도 뼈와 거죽뿐인 할머니의 몸은 그야말로 깃털 같다.

올해 할머니의 몸 여기저기에 이상이 발견됐다. 외가에 계실 땐 별 얘기 없었는데 거처를 작은 이모 댁으로 옮기신 후에 자꾸 아프다셔서 이모부가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눈도 뱃속의 장기도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하지만 의사는 수술을 권하지 않았다. 몸에 기력이 없으셔서 자칫 수술을 했다간 오히려 돌아가실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지금 우리집에 머무시는 동안 할머니는 내내 소파에 누워계신다. TV가 켜져 있으면 TV를 보고, 안 켜져 있으면 주무시거나 그냥 누워계신다. 나는 눈도 침침하고 몸에도 힘이 없어서 마냥 누워 있어야 하는 24시간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가끔 할머니에게 집밖으로 나가 아파트 동 한바퀴만 돌아보자 권해도 봤으나 못하겠다는 대답만 들었다. 복지관 교육을 많이 다니신다는 서예 선생님한테 할머니 얘길 했더니, 붓을 쥐어주고 획 긋는 연습을 해보시라 권하거나 그도 못하시겠으면 노래를 틀어드리라고 하더라.

몸에 힘이 있을 때 할머니는 정말 부지런하셨지. 할머니가 오시면 비실비실한 화분들이 어느새 쌩쌩해지곤 했다. 늘 정성스레 이파리를 하나하나 닦아주셨던 게 기억난다. 지금 우리집 화분은 할머니가 오셨어도 병들어서 시들시들하다. 눈이 잘 안보이셔서 더 이상 화분을 닦아주지 못한다.

요즘 할머니의 낙은 식사 후에 김태희가 선전하는 커피믹스로 탄 커피를 한 잔 드시는 것. 물도 적게 넣어 찐~해야 하고 온도도 펄펄 끓듯 뜨거~워야 좋아하신다. 밥상 물릴 때는 그런 말씀 안 하시는데, 커피잔 내려 놓으실 때는 한 마디씩 하신다. "아이고~ 잘 묵었다~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나다~." 어찌나 뜨거운 걸 좋아하시는지 국도 뜨끈뜨끈한 상태로 후루룩 마시다시피 드신다. 국도 별로 안 좋아하고 뜨거운 것도 잘 못 먹어서 식혔다 먹는 날 보고는 넌 어째 음식을 그렇게 맛없는 상태로 먹냐며 타박하셨다. ㅎㅎ

할머니께 살갑게 대해드리지는 못하지만 일단 아침엔 눈앞까지 가서 할머니 손을 덥석 잡고 흔든다. 정상회담에 나선 두 지도자 마냥 손을 잡고 흔들면, 할머니가 '얜 왜 이래'라는 심정이실지는 몰라도 어쨌든 크게 웃으며 좋아하신다. 옆에 앉아서 할머니 발을 내려다 보다가 "우아, 할머니 발 크네. 이제보니 팔도 길고, 다리도 롱다리네요" 그랬더니 "응 내가 젊었을 때 부터 발은 컸제~ 다리도 길었제~"라고 은근 자랑. 내발이랑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니 난 발볼도 넓고 넙적한데, 할머니 발은 발볼이 하나 없이 길쭉하다. 엄지보다 둘째 발가락이 긴 것도 특이하다. 엄마 발은 누구 닮았나 싶어 엄마를 중간에 앉혔다. 요래조래 뜯어보며 닮았나 본다. 사진엔 없지만 엄마보단 내 동생 발이 할머니랑 더 비슷한 것 같다.

외가에선 외숙모가 기가 세서 방 밖으로는 잘 나오시지도 않고 말씀도 거의 없으시다는 할머니. 우리 집에서는 끼니 제때 안 챙겨 먹는다고, 김치가 너무 묵었다고, 국 차게 먹는다고 잔소리도 많으시지만, 너무 아프시지 말고 오래 머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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