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애호가적 생활

[욥의 노래] 읽기

Zigeuner 2016. 9. 24. 19:48

도통 진득하니 책을 읽지 못합니다.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은 한가득인데, 주의 산만이 문제에요. 저는 예나지금이나 무척 산만한 사람입니다. 이럴 땐 강의를 듣는 게 도움이 됩니다. 혼자 책을 읽고 소화하는 것보다 훨씬 지평이 넓어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강의를 듣고 난 후 정리를 해야, 그 내용이 온전히 내 것이 되겠죠. 듣고 돌아서기만 한다면 휘발되어 날아가버릴 것입니다.


최근 들은 강의를 소개하려고 뜸을 들였어요.



백미인의 오프라인 강의를 들었습니다. 3주 강의구요, 내용을 녹화중이니 아마 온라인으로도 서비스되겠죠. 성경 욥기를 문학, 심리학, 예술로 풀이하는 강의입니다. 인용되는 텍스트도 많아서 무척 흥미롭습니다. 온라인으로 서비스되면 한 번 들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욥의 노래 - 10점
김동훈 옮김/민음사


민음사 세계시인선의 '욥의 노래'를 번역하신 김동훈 선생님한테 예전에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운 적 있습니다. 언어를 배운다는 재미보다도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다양한 철학과 문학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컸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수업 역시 선생님이 신학과 고전학을 두루 전공하셨으니 '욥기'도 신학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주시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대로의, 아니 그 이상의 수업이었어요.

아직 한 주가 남았는데, 우선 지난 두 강의를 되짚어볼까 합니다.


이 강의의 부제를 보겠습니다. '괴물같은 사회에서 신과 맞짱 뜨기' 수업 시작하기 전에 이 부제가 좀 도발적이라고 느껴졌어요. 신과 맞짱을 뜨다니.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로 사역하시는 선생님 강의에 이런 제목이 붙다니? 백미인에서 마케팅 좀 해보려고 자극적인 제목을 붙였나,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직접 붙인 제목이더라고요. 첫 시간에는 이 제목을 둘로 쪼개어, 각각의 측면을 살펴보았습니다.


1. 괴물같은 사회에서 --> 타자와의 갈등/대립: 비극의 시작 --> 욥기를 비극으로 읽기 <내용적 측면>

2. 신과 맞짱 뜨기 --> 법적 논쟁 (희랍 비극과 비슷/아마 비극의 원형이 아닐까!) <형식적 측면>


선생님이 비극의 원형적인 구조라고 추측한 '법정 논쟁' 구조는 희랍 비극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다만 몇 가지 차이라고 한다면 희랍은 짧게 주고받는 격행 대화지만 욥기는 긴 대화가 교차하죠. 또 희랍에서는 판결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관객이 스스로 판결 역할을 하게 하지만 욥기에서는 신이 판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욥기가 문학적으로 가치가 낮다고 평가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심리학으로 욥기를 해석한 두 번째 강의에서 그에 대한 반론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번째 강의는 욥기에서 말하는 '죄'를 심리적으로 풀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욥을 위로하러 찾아왔던, 그러나 결국 비방만 잔뜩하러 왔던 친구들의 죄와 욥기의 죄를 살펴보았고 신의 판결이 그 긴장을 어떻게 해소하는지 각 대목을 찾아읽었습니다. 여기서 '죄'란 히브리어 '하타', 희랍어 '하마르티아'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과녁에서 빗나감'을 뜻합니다. 즉 의도에서 빗나간 행위로, '허물' '실수' '결점' 등으로 번역된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욥의 노래'를 번역하면서 '흉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마음이 음흉한 상태'라는 사전상 첫번째 의미를 살려 '죄의 은폐성'을 살린 것입니다.


친구들의 허물에서 설명하면서 언급한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이 무척 기억에 남습니다. 친구들에게 욥은 모방할 모델이었는데, 그들이 경쟁관계가 되면서 욕구의 대상이 희미해지고 오로지 이기는것만이 목표가 됩니다. 결국 위로하러 온 친구들은 욥에게 상처만 줍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없지만,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곳에 꽂힌 거죠. 욥을 도덕성으로 공격하는 점에서 도덕종교의 위험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초자아가 자아를 억압할 경우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죠.


욥의 경우도 친구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욥에게도 초자아가 자아를 억압하는 도덕종교의 위험이 보입니다. 자녀에게 말하는 흉물(1:5)과 자신에게 말하는 흉물(2:10)의 기준이 다른 점에서 이런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식을 잃고도 신에게 찬양을 드립니다. 이 모습이 어딘지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았는데요. 바로 그런 이유로, 애도를 충분히 거치지 못하고, 상실 후 그 리비도를 자신에게 쏟아 그 부정적 영향으로 우울증에 빠진 모습으로 욥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욥이 가진 또 하나의 문제로 '수치심'과 '혐오'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허물은 신의 판결로 모두 해결됩니다. 우울증도, 수치심과 혐오도 모두 해결되는 것이죠. 그 열쇠는 바로 '관계의 회복'이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친구들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42:8의 한 대목입니다. "욥이 너희를 위해 제물을 바치고 너희를 위해 기도하게 하라" 신은 욥을 중재를 위한 제사의 제사장으로 썼습니다. 이로써 친구와 욥의 관계를 회복시킨 것이죠. 두 번째로 자녀와의 관계 회복은 다음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42:11 "욥의 형제와 자매 전부와 전부터 그를 알던 전부가 욥에게 와서 그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먹고 주께서 그에게 주신 온갖 재앙에 대해 욥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였다" 상실로 인한 우울을 회복하려면 건전한 애도가 필요한데, 이 구절에서 애도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계가 회복된 다음 최종적으로 신과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우울, 멜랑콜리를 이야기하면서 수업을 듣는 모두가 자연히 최근의 사건사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애도를 하지 못하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욥은 신과 사탄의 내기 때문에 재앙을 겪었고 신의 판결로 재앙에서 벗어났습니다. 지금 비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그 비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비탄과 우울의 원인이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고 사회적인 이유가 얼기설기 얽혀있기 때문이라면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같이 수업을 들은 이들과 강의실을 나서며 나눈 질문들이었습니다.


+ 수정 09.26

본문에 초자아가 이드를 억압한다는 부분을 '초자아가 자아를 억압한다'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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