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애호가적 생활

선반을 정리하며 깨닫는 인생

Zigeuner 2013. 3. 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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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슈퍼마켓엔 어쭈구리들이 산다

저자
사이먼 파크 지음
출판사
이덴슬리벨 | 2011-12-1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안전함과 안락함을 뒤로 하고 슈퍼마켓 직원으로 새 인생을 출발한...
가격비교

먼저 이 책을 덮은 후 사전에서 어쭈구리를 찾아봤다. 표준어인가 싶어서. 아니었다. 어쭈구리라는 단어를 채택한 출판사의 의중이 좀 궁금하다. 이 책의 원제는 "Shelf life : how I found the meaning of life stacking supermarket shelves"로, 20년 동안 신부 생활을 해온 작가가 신부직을 그만 두고 런던의 슈퍼마켓에서 일하며 겪은 일상을 재치있게 적었다. 전직 신부님이어서 그런지 그 시끌벅적하고 사건이 끊이지 않으며 온갖 감정이 요동치는 슈퍼마켓 풍경을 관조적으로 그리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무려 20년을 대형 슈퍼에서 근무하며 우리 자매를 길러낸 엄마 모습도 많이 겹쳐졌다.

1년에는 다섯 계절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윈스턴이 떠나는 계절. 사실 나는 떠나겠다는 사람에 에워싸여 살아가고 있다. 갈 거야, 떠날 거라니까, 어디든 가고 말거야... 하지만 다들 여전히 남아있다.

+ + +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사람처럼 매일 아침을 시작해야 하는 거야. 이 근사한 땅에 처음 내려선 순진한 사람처럼 말이지."

나는 평소보다 훨씬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에 깨어나고 싶다. 그래, 좀 더 경이로운 마음으로, 내 꿈은 평화로운 적이 드물어 종종 잠 못 들고 뒤척이기 일수다. 그래서 내게는 아침 의식이 있다. 일단 일어나면 진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고, 텅 빈 거리를 조깅한 후에 명상을 즐긴다. 그러면 훨씬 나이진다! 모든 것이 가능하게 느껴지고, 슈포마켓의 일상도 훨씬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천재성이란 하루가 당신을 힘겹게 만들 때 오히려 희망을 거머쥐는 능력에 있다. 그것도 가능한 한 즉시.

+ + +

처음 바깥나들이를 하던 날, 그러니까 런던의 심장부에서 세상을 향해 용감하고도 뒤뚱거리는 최초의 발걸음을 내딛던 날 딸아이도 개똥을 밟았었다. 아이의 밝은 빨간색 샌들에 묻은 똥을 닦다가 손에 묻었을 때, 나는 일부러 소리 내 말했다.

"걸어 다니면 원래 이런 거야. 익숙해져야지."

하지만 왜 내 절망감을 지혜인 척 가장해 아이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일까? 딸애도 살면서 나름의 절망에 직면하게 될 테고, 또 나름의 해답을 찾아낼 텐데 말이다.

+ + +

"뭐, 서로 믿고 신뢰하는 게 좋은거니까, 그렇죠?"

"아니야."

"아니, 옛날에 신부였다는 분이 신뢰가 나쁜 거라는 거예요?"

"신뢰란 내가 하겠다고 맘먹어서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거야."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생전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종종 신뢰라는 것이 열망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도 되는 양,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도덕심을 그러모으기라도 해야 하는 듯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신뢰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누군가 삶에 크나큰 은혜를 베풀 때 우리는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했던 무언가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 + +

인간이라는 동물은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대상에는 끝 간 데 없이 매혹당하고,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대상에는 심히 지루해한다. 때론 그 모습이 이상하기 그지없다.

+ + +

생존의 두려움이 나를 휘감았다. 이제 남은 생애는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고, 생계는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비록 대부분의 날에는 아침에 눈을 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하지만, 오늘 오후에 나는 자기 연민에 압도당하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느낌에 억눌려 있었다. 

친구는 내 말을 따뜻하게 들어주었지만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중에 어느 누가 다른 사람 버전의 지옥에 관해 가타부타 말할 수 있겠는가? 윌리엄 블레이크(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이자 화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인식의 문이 정화된다면 만물은 인간에게 그 자체의 무한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인간은 자기 동굴의 좁은 틈을 통해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를 닫아 놓고 살기 때문이다."

친구는 내 말을 들어주기 위해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좁은 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이 미친 남자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쇼핑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나는 바보가 된 듯한 기분으로 다시 선반 앞으로 돌아가 물건을 채우고 또 채웠다. 잠시 후 친구는 스위스 초콜릿바 하나를 들고 돌아와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걱정 마. 계산했으니까."

"그럼 쫓아가서 잡지 않아도 되겠네."

"그래도 상관없어."

"나도."

친구는 나를 안아주고 키스해준 후 떠났다. 그건 참으로 안전한 느낌이었다.

+ + +

사는 게 평온할 때는 사실 종교 같은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갈 때면 수세기에 걸친 신학적 폭력 행위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인간의 다양한 종교는 세계 이곳저곳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학살을 자행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매장 내의 개인적인 관계는 원만하고 모든 것이 평화로우며 안정적이다. 흔히들 말하듯이 '신발이 잘 맞으면 발을 잊게 되는 법'이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태도도 변하고 지렁이도 꿈틀거리는 것 아니겠는가. 공기 중에 긴장감이 흐르면 갑자기 종교가 중요해진다."

+ + +

언젠가 우연히 인쇄물 하나를 읽었다. 앞쪽에는 '좋은 부모'의 7가지 자질이 적혀 있었고, 뒷장에는 '좋지 않은 부모'의 7가지 특징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중 몇 개를 차용해 지금까지도 지켜나가고 있다. 우선 '좋은 부모'의 조건을 살펴보자.

1) 몇 명의 독립적인 인간을 거의 20년 동안 이끌어갈 만큼 충분히 강하다.
2) 아직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개발하짐 소한 아이의 욕구에 늘 주의를 기울인다.
3) 사람과 사회의 활동에 관심이 많다.
4) 스스로 헤쳐가는 삶의 모험에 관심이 많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스스로 이해하며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길 기원한다.
5) 주변의 사람들에게 늘 함께하길 독려하고 모험심을 장려한다.
6)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속에서 살아간다.
7) 좋은 시절이든 안 좋은 시절이든 곧 지나갈 것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번에는 '좋지 않은 부모'편이다.

1) 자신의 재미, 우정, 힘, 통제력 등 스스로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아이를 이용하려 든다.
2) 아이를 겁주고 조종하는 데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힘을 이용하려 든다.
3) 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존재도 가치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든다.
4) 잘못된 일만 강조하거나 더 잘할 수도 있었다는 식의 주장만 하는 부정적인 존재다.
5) 다른 영혼에게 여유를 베풀기에는 해결하지 않은 분노나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6) 자신이 모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심부름꾼 같다고 느끼며, 피곤해하고 짜증 부리고 분노하는 데 극도로 에너지를 소모한다.
7) 늘 기분에 따라 행동하며 아이를 대하는 데 일관성이 없다.

물론 나는 14가지 모두에 해당한다. 하지만 앞서 제시한 7가지를 더 선호한다.

+ + +

누구나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세 살배기 아이처럼 허둥댄다.

+ + +

나도 정말 힘든 시기가 있었어. 내 말 믿어. 절망에 빠져서 절벽에 올라가 뛰어내리려고 시도했던 적도 있고, 악몽을 꾸며 흐느껴 울던 밤도 얼마나 많았는데. 그렇지만 무슨 일이 닥치든 간에 결곡에는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어. 왜냐하면 이야기의 끝이란는 건 없거든. 그게 내가 발견한 사실이야. 이야기는 바뀌는 거야. 내 경우에는 확실히 그랬어. 결코 끝나지는 않아. 그리고 네 것도 아주 좋은 거라고, 캐스파. 이제 막 시작한 이야기거든."

+ + +

그리고 오늘은 피노키오가 떠나는 날이다. 농산물 통로에 서서 커다란 창유리를 통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나는 구름이 '안녕, 잘 있어'라고 말하며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 구름은 늘 왔다가 가고, 다양한 모양과 형태로 뭉게뭉게 모였다가 흩어졌다. 뉴먼 추기경이 말했듯이 '삶이란 변하는 것이고, 완벽함이란 자주 변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피노키오를 찾아 나섰다.

슈퍼마켓에 사는 '어쭈구리'들은 슈퍼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냥 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이 사람들이 미워지기도 하고 귀여워지기도 하고 정이 든다. 각양각색의 캐릭터들 중에는 밉상으로 묘사된 인물들이 더 많았다. 어느새 귀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만약 지금 내 옆에 이 어쭈구리들이 있다면 아마 때려주고 싶겠지.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는 매우 미운 '어쭈구리'일 것이다. 

(전자책으로 읽은 경우엔, 발췌 위치를 어떻게 표시해야 좋을까. %로? ㅎㅎㅎ 이것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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