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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각색의 성공 사례가 아닐까, ITA Live [오이디푸스] 후기

Zigeuner 2021. 10. 16. 23:43

일시 : 2021년 10월 8일 금요일 오후 7시30분

장소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출처 : 국립극장 홈페이지

이번에 NTOK Live 를 패키지로 끊어서 4개의 해외작품을 보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 [오이디푸스]였다. 사실 너무 유명한 내용이어서 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아닌가 싶다. 네덜란드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의 극으로 연출은 로버트 아이크. 영국 가디언지가 "영국 연극계의 최대 희망"이라고 극찬한 연출가라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괜히 나온 극찬은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야외에서 찍은 듯한 영상이 나와서 좀 당황했다. 무대를 찍은 게 아니었어? 연극에서도 그 영상을 틀어주고 나서 극이 시작되는 거였다.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정치인. 선거결과가 곧 나올 예정이고 당선이 유력하다. 그는 기자들을 향해 전임자 라이오스의 의문스러운 죽음의 진상을 밝힐 것이며, 자신의 출생증명서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거사무소로 돌아와 곧 나올 결과를 기다린다. 사무실 안에서는 결과가 나올 시간에 맞춰 카운트다운 시계가 돌아가고 있다. 거기서 오이디푸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예언을 눈먼 예언자로부터 듣는다. 현대사회에 예언자라니! 좀 웃기다, 라고 생각했지만 대통령 예비후보가 손바닥에 王자를 그리고 나오기도 하는 게 이른바 '현대사회'이니...사실 안 웃기다.

 

사무소에 찾아오는 사람은 예언자뿐만이 아니다. 고향의 어머니도 갑자기 나타나서 할말이 있다고 몇번이나 얘기한다. 오이디푸스의 아내와 아이들도 찾아와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가족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오이디푸스의 아내 이오카스테가 정말 존재감이 대단했다. 연극의 큰 줄기는 두 가지 예언의 진위를 파악하면서 흘러간다. 1)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은 오이디푸스다. 라이오스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오이디푸스는 젊었을 때 교통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라이오스의 죽음의 진실은 조용히 은폐되었고, 오이디푸스도 자기가 죽인 것이 라이오스라는 사실을 몰랐다. 과거 라이오스의 차를 운전했던 운전수의 진술을 통해 두 사고가 실은 같은 사고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불안이 요동친다. 예언 두 가지 중에 하나가 맞았으니까. 그럼 나머지 예언 하나는? 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잘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지금 위중한 상태로 병상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날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도착한다. 그때 오이디푸스의 해방감!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도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일 기회'가 이제 없다는 데 더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비극의 주인공답게 오만하고 고집센 오이디푸스가 서서히 무너져 마침내는 바닥을 아이처럼 구르며 '엄마'를 부르짖게 되기까지 그 과정의 연기가 굉장했다.

 

이 극은 오이디푸스 외에 이오카스테의 서사에도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어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오카스테가 왜 아이를 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서사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그 아이가 실은 오이디푸스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그 장면, 이오카스테가 먼저 깨닫고 뒤이어 오이디푸스가 깨닫는다. 자신만만한 오이디푸스는 어디에도 없고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마저 잃어버렸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난 다음에도 이오카스테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그러니까...오이디푸스보다?) 그 바로 다음 장면이 자살씬이어서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연극은, 처음 그 선거사무소로 이오카스테를 데려온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

 

고향의 어머니는 왜 오이디푸스를 찾아왔을까

NTOK Live 보면서 처음으로 관객들이 커튼콜 영상을 보며 박수를 쳤다. 나는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상 디테일에서 구멍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라이오스 사후에 몇 십년이 지나도록 후임이 없었다던가..) 그래도 그런 구멍이 흠으로 여겨지지 않을만큼 성공적인 각색과 연출인 것 같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를 연기한 두 배우 외에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크레온이랑 안티고네가 함께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이 각색으로 스핀오프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저절로 긴장감이 생기는 씬이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표가 없어서 포기했다. 그 점이 제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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