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유미리의 트위터를 팔로우하고 있다. 최근 꾸준히 지켜본 글타래에서 그녀가 서점을 열었다는 소식을 알 수 있었는데, 서점을 연 곳은 다름아닌 후쿠시마였다. 왜 그녀는 후쿠시마에 책방을 열기로 결심했을까. 마침 소개하고 싶은 기사들이 있어서 옮겨보았다. 일본어 강독시간에 함께 읽느라 분량을 줄여야해서 전문이 아니라 부분이다.
<유미리, 서점 ‘풀하우스’ 기사>
https://www.buzzfeed.com/jp/kotahatachi/fullhouse 중 일부 발췌
출처: 버즈피드 기사
私、避難指示が解除される前に小高や浪江の住民説明会に出ていたんです。
みなさんが、「必要最低限なものすらない」と声をあげられていました。そこで出る要望というのは、病院だったりスーパーだったり、生活に必要な最低限のものだったんです。
けれども、まちというものを考えたときに、必要最低限なものだけしかないまちは、本当に復興した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か。
本屋って、用がなくてもふらりと立ち寄れる場所ですよね。魚屋さんや商店のように、何も買わないで出て行ってもいいじゃないですか。
ゆとりだったり、生活の中の伸びしろだったりするもの。そこからは、暮らしの潤いや、豊かさが生まれるはずですよね。
저는 피난지시가 해제되기 전에 오다카와 나미에의 주민설명회에 갔었습니다.
모든 분이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조차 없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요구사항들은 병원이나 슈퍼처럼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을이라는 곳을 생각했을 때,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갖춘 마을이 정말로 다시 살아나게 될까요.
서점은 딱히 용건이 없어도 불쑥 들르는 장소지요. 생선가게나 상점처럼 무얼 사지 않고 나가도 괜찮잖아요.
삶의 여유이거나 잠재력이기도 한 곳. 그곳에서는 삶의 정감과 풍성함이 싹틀 것입니다.
私、本を一番読んだのは小、中学校のときだった。なぜ読んだかというと、現実が辛かったからなんですよ。(...)
本の名前などを記すところを「扉」というんですよね。めくることができるその扉の中は、異世界。私にとって、現実から逃げ込む場所だったんです。
南相馬に住む知人やご住職からも聞くんですけれど、ここでは自殺が増えている。福島は、岩手や宮城と比べても突出して多いんですよね。
(...)
自分の子供時代だって、学校も家も辛かったから、死はリアルなものとして目の前にやってきていた。
そういうときに、本という異世界への扉があれば、違うのではないんじゃないか、という気持ちが強いんです。
제가 처음 책을 읽은 것은 초등학교, 중학교 즈음이었습니다. 왜 책을 읽었냐하면, 현실이 괴로웠기 때문이에요. (...)
책의 제목을 적는 부분을 ‘도비라(문)’이라고 하지요. 젖힐 수 있는 그 문 속은 또 다른 세계. 제게 있어 현실에서 도망쳐 들어갈 장소였어요. 미나미소마에 사는 지인이나 주지스님한테서 들었는데 여기는 자살이 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는 이와테나 미야기와 비교해도 그 수가 특히 많다고 합니다. (...)
제 어린 시절만해도 학교도 집도 괴로웠기 때문에 죽음은 현실적인 것으로 눈 앞에 찾아왔습니다. 그럴 때 책이라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있다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処方せんのように、本を手に取ってもらいたい。深いかなしみを治癒する場になってほしいんです。本って、そういう作用があると思いますね。
かなしみはなくすのではなく、かなしみとして、抱え込む「哀」のほうに、大事にするべきものだと思うんです。(...)
みんな、その人にとって大事なものを失ったから、かなしんでいる。だから、かなしみごと大事に抱えていくといい。
日本語の美しい言葉で、「手当て」っていいますよね。そこに触れない、なかったことにするわけではなく、そこに触れる。
「フルハウス」が、かなしみに手を当てる、あやす、そんな作業ができる場になればいいと思っています。
처방전 삼아 책을 손에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슬픔을 치유할 장소가 되면 좋겠어요. 책이란 것에 그런 작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슬픔 그대로 끌어안는 ‘哀애’의 방향으로 소중히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
모두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 슬픈 그대로 소중히 안고 가면 됩니다. 일본어의 아름다운 단어 가운데 ‘手当(てあ)て(손얹기=치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기(상처)에 상관하지 않기, 없었던 셈 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닥뜨리기.
‘풀하우스’가 슬픔에 손을 얹는, 달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