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애호가적 생활

지지 않는다는 말

Zigeuner 2020. 1. 1. 22:44
반응형

한해의 시작을 책과 함께 했습니다.
어느 해엔가는 밤샘공연을 보고 와서는 새해 첫날을 잠으로 보낸 적도 있었는데,
그때 참 허무했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도 공연 유혹이 있었으나, 이겨냈어요.... 아니, 사실은 티켓팅에 실패했습니다... ㅜㅜ)
이유야 어찌됐든 책과 함께 한 시작은 꽤 좋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은 한해에도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


지지 않는다는 말
국내도서
저자 : 김연수
출판 : 도서출판마음의숲 2012.07.07
상세보기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다른 산문집은 읽지 않았었네요.
이 책만 해도 출간 당시에 서점에서 몇 편 들추어 읽고 말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읽었는데 새해 첫 책으로 참 맞춤인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기에 대한 소회를 중심으로, 감각을 열고 순간을 경험하며 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거든요.
아마도 올 한 해 마음에 담아두고 지낼 듯 합니다.

이 세계가 네 감각을 일깨우는 한, 나는 매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 경전의 말씀을 부정하면서 글을 썼지만, 이건 다시 경전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마르코 폴로의 일생은 분명 실패한 삶이다. 세속적으로 바라봤을 때, 이탈리아의 지방 시장으로 살았더라면 그의 삶은 성공한 삶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으로서 그가 선과 악에 무디어지고, 하루하루 반쯤 잠든 채로 살아간다면 그걸 제대로 된 삶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다시 말해서 희로애락의 고통을 피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 지복의 삶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건 복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감각이 잠든 삶이리라. 감각이 잠들면 우린 자신이 지금 숨을 쉬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알지 못한다.

18-19쪽 ‘기뻐하고 슬퍼하라, 울고 웃으라’ 중
틱낫한 스님이 전하는 베트남의 속담은 다음과 같다. "공동체를 떠난 수행자는 파괴될 것이다. 산을 떠난 호링이가 인간에게 잡히듯이." 내 식대로 고치자면, 삶의 수많은 일들을 무감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순식간에 노인이 될 것이다. 기뻐하고, 슬퍼하라. 울고 웃으라. 행복해하고 괴로워하라.

21쪽 ‘기뻐하고 슬퍼하라, 울고 웃으라’ 중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기쁨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이 기쁨은 정말 뜻하지 않은 것이어서 마치 길을 가다가 큰돈을 줍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사전에는 활수(滑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시원스럽게 잘 쓰는 씀씀이"라고 나와 있다. 달리기를 마치고 나면 활수 좋게 산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게 된다.
...(중략)... 몸은 전혀 뛰고 싶지 않은데도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몸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에 달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는 아마도 매일 뭔가를 끝낸다는 그 사실에서 이 기쁨이 오는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고통과 경험이 혼재하는 가운데, 거기 끝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자발적으로 고통이 아니라 경험을 선택이 옳았다는 걸 확인할 때, 그렇게 매일 그 일을 반복할 때, 세세한 부분까지 삶을 사랑하려는 이 넉넉한 활수의 상태가 생기는 것이라고. 어쨌든 아직까지 그 이유는 모는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가능하리라.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시작할 때 그렇지 않다면, 끝날 때는 반드시 그렇다.

26-27쪽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중
유행가를 나는 좋아한다. 영원과는 거리가 먼, 곧 잊힐 노래라서. 그럼에도 바로 그 이유로 영원히 기억에 남으므로.
유행가의 교훈이란 이런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좋아하자. 하지만 곧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올 텐데, 그때는 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물론 더 좋은 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다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아무튼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 좋아하자. 그게 바로 평생 최고의 노래만 듣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최고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사는 것이리라. 물론 가장 좋은 삶이라는 건 매 순간 바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제대로 산다면, 옛날에 좋아하던 유행가를 들을 때처럼 특정한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경험들을 많이 할 것이다.
결국 최고의 삶이란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뜻이다. ... (후략)

30-31쪽 '끈기가 없는, 참으로 쿨한 귀' 중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때로 즐거운 마음으로 조간신문을 펼쳤다가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물론 마음이 약해졌을 때다. 하지만 그 약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가장 건강한 몸은 금방 지치는 몸이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42쪽 '하늘을 힐끔 쳐다보는 것만으로' 중
외로운 밤들을 여러 번 보낸 뒤에야 나는 어떤 사람의 속마음을 안다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하물며 누군가의 인생이 정의로운지 비겁한지, 성공인지 실패인지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45쪽 '그저 말할 수만 있다면, 귀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 중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

53-55쪽 '지금 이 순간, 내가 아는 이 여름의 전부' 중
행복과 기쁨은 이 순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즉각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행복와 기쁨이란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겨울에 눈이 내린다면, 그날은 행운의 날이다. 내일의 달리기 따위는 잊어버리고 떨어지는 눈이나 실컷 맞도록 하자.

150쪽 '로자는 지금 노란 까치밥나무 아래에' 중
혼자서 고독하게 뭔가를 해내는 일은 멋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161쪽 '혼자에겐 기억, 둘에겐 추억' 중
간절히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기 위해서 온 우주가 움직인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자주 우주는 내 소원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소원을 말하는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결혼이 아니라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해야만 할 것이다. 결혼은 어려울 수 있지만, 아낌없이 사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그건 내 쪽에 달린 문제니까. 마찬가지로 마라톤 완주가 아니라 매일 달리기를 원해야만 한다. 마라톤을 완주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매일 달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설명하기 무척 힘들지만, 경험상 나는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

204-205쪽 '어쨌든 우주도 나를 돕겠지' 중

※ 210-213쪽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 는 전체가 마음에 드는 꼭지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고 형태와 색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면,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과 좌절이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걸. 내 절망과 좌절은 과거에 있거나, 두려움과 공포는 미래에 있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감각적 세계뿐이라는 걸.

251쪽 '오래 달리거나 깊이 잠들거나' 중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