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읽은 것은 2006년. 기록을 찾아봤는데, 다른 소리는 없이 '마음이 이상하다'라고만 썼다. 아마 트위터든 어디든 이 작품에 대해 썼을텐데. 그때 블로그 이웃인 M님이 이 책을 읽고 울었다는 얘기를 해주셨더랬는데.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이상했다'고 썼을 뿐. 책을 읽고나면 내용이 많이 휘발되어 버린다. 다만 그 책이 좋았다, 혹은 나빴다 라는 인상만 남고. 줄거리는 휘발되어도 한 장면만 계속 뇌리에 남는다든가. 소설 <자기 앞의 생>이 내 머리속에 남겨두고 간 장면은 나딘의 녹음실이었다. 그 장면을 인용하자면,
그녀는 거기가 녹음실이라고 내게 설명해주었다. 화면의 등장인물들은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목소리를 불어넣어주는 것은 그 녹음실 사람들이었다. 어미새들처럼, 그들은 등장인물들의 목구멍에 소리를 심어주고 있었다. 순간을 놓쳐서 목소리가 제때에 나오지 않으면 다시 해야 했다. 그러면 멋진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서 살아 있을 때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단추를 누르자 모든 것이 뒷걸음질쳐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동차들이 거꾸로 달리고 개들도 뒤로 달리고, 무너졌던 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시체에서 총알이 튀어나와 기괸총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살인자들은 뒤로 물러서서 뒷걸음질로 창문을 훌쩍 넘어 나갔다, 비워졌던 잔에 다시 물이 치올랐다. 흐르던 피가 시체의 몸으로 다시 들어가고 핏자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며 상처도 다시 아물어버렸다. 뱉은 침이 다시 침 뱉은 사람의 입으로 빨려들어갔다. 말들이 뒤로 달리고 팔층에서 떨어졌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창문으로 돌아갔다.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왜 이 장면이 기억에 남았을까.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라는 문장이 사무쳤을까.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나도 떠올렸을까. 어쨌든 줄거리는 희미해져도, 생생히 남아있던 거꾸로 도는 화면의 묘사 때문에, 이 소설이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녹음실 씬이 어떻게 각색될 지가 궁금했다.
무대는 모모와 로자가 사는 건물을 벗어나지 않았다. 주변 등장인물이 있긴 하지만, 로자와 모모의 이인극에 가까웠다. 모모가 접하는 외부세계, 나딘과 나딘의 녹음실은 대사로 처리되었다. 좀 아쉬웠다. 공간의 제약이 있는 연극이니까. 하지만 거꾸로 도는 필름이 이 연극에서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연극의 마지막 부분, 나는 필름이 감기는 소리를 들었다.
촤르르르르르
두 사람의 지난 시간이 무대의 한 벽면에 떠올랐다. 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지켜주었던 시간이었다. 필름이 감기는 소리는 왜 슬프게 들리는 것인지. 소중하지만 지나간 것, 지나갔기에 더욱 소중한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마치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씬처럼. 주변에서 갑자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흐느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