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카 코타로의 중력삐에로를 원서로 읽었다. 사실 올초부터 손에 들었는데 내용이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일본어의 한계 때문에 지지부진 진도를 못 빼다가 막판에는 역서와 같이 두고 읽었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알게 되기도 했다. 원서(문고본)와 역서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역서에 있는 대사가 문고판엔 없다던지, 형제의 대화가 뒤바뀌어있다던지... T가 검색으로 알려준 바에 따르면, 역서는 단행본을 기준으로 작업되었고, 이 작품의 경우 이사카 코타로가 문고본을 내면서 내용을 수정해서 썼기 때문에 분위기가 꽤 바뀌었다고 한다. 일본 문고본은 내용의 축약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의아했는데 T덕분에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은 시작과 끝의 문장이 같다. '春が二階から落ちてきた。(봄이 2층에서 뛰어내렸다.)' 사실 봄이라기보다, '하루'라는 음독으로 읽어야 하고 하루는 동생의 이름이다. 이 소설은 두 형제의 대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특히 하루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기 때문에 그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아버지가 주인공 같다. 이야기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같은 이 느낌. 아버지 캐릭터가 유독 맘에 들었던 내 편애 탓일지도 모르지만.
이즈미(형)와 하루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다. 보통 체격에 온화한 성격을 지닌 사람, 여러번 얘기를 나누어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종류의 사람. 이즈미는 엄마에게 고흐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두고 한 말을 예로 들면서, 그림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만큼 사람의 진가도 알아차리려면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한 거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난 바로 알아차렸는데' 라고 말한다. 아버지를 염두에 둔 대화였다. 도쿄 출신의 엄마는 센다이로 촬영을 왔다가 촬영허가를 담당하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보고 '이 사람은 다른 남자랑은 다르구나'라고 바로 알아차렸다. 도쿄로 돌아간 후 바로 짐을 정리해서 다시 센다이의 아버지를 찾아갔고 그렇게 가족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가족의 뿌리를 뒤흔들만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앙도 없으면서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신이 대답하길 '너 스스로 생각해 내!' 라고. 신의 대답대로 그는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해서 가족을 지켜나간다. 이즈미는 생각한다. 아버지는 정말 평범 그 자체에 볼품없지만, 역시 대단한 사람이라고. 고흐라면 그 진가를 알아봤을텐데,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고. 지금은 엄마도 죽고 없으니, 안타깝다고.
책을 다 읽고 나면, 사실 뒷맛이 쓰다. 하루와 이즈미는 중력을 벗어나지 못한 괴로운 영혼들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중력을 무시하고 우는 얼굴로도 즐겁게 하늘을 나는 삐에로는 결국 아버지 혼자였을까. 이제 아버지도 없는데, 하루와 이즈미는 가족을 옭아매던 보이지 않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두 사람 모두 삐에로의 아들로서, 인생을 즐기며 중력에 구애받지 않으며.
P.S.
소설을 마치고, 영화를 보았다. 이즈미는 카세 료, 하루는 오카다 마사키. 꽤 어울리는 캐스팅이다.
그러나, 절정의 캐스팅은 역시 아버지였다고 본다. 코히나타 후미요. 뭔가 소설의 묘사와 절묘하게 어울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와타베 아츠로는.... ㅠㅗ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