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서 연재하는 '지식인의 서재' 한켠에 보면 지금까지 참여한 명사들에게 추천을 많이 받은 책 TOP 10을 추려놓았다. 그 중 5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 언제고 한번은 읽어봐야지 하고 사두고서는 늘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책의 두께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작가에 대한 지식 없이 책을 읽다가 책에 붓다에 대한 언급이 많아 굉장히 놀랐다. 읽기를 중단하고 작가 약력을 잠시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불교에 깊이 심취하였고, [붓다]라는 책을 쓰기까지 했다. 조르바가 '책벌레' 혹은 '펜대 운전수'인 "나"에게 던지는 말들은 모아 보면 불교 선승들의 선문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유럽 작가의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간간히 잊을만큼.
조르바는 삶을 그야말로 온 몸으로 살아서 깨우쳐가는 사람이다. "나"는 요새 유행하는 말로 세상을 '글로 배웠어요'라고 말할 사람. '글로 배웠어요' 광고 시리즈가 헛웃음을 유발하는 그 지점과 화자 '나'가 자신의 삶을 회의하고 괴로워하는 지점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김정운 교수가 이 글의 감상문을 의뢰받고 재독한 뒤 일본으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던가? 그 심정이 이해간다.
먼저 먹읍시다. 먼저 배를 채워 놓고 그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지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 육반입니다. 우리 마음이 육반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갈탄광이 우리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갈탄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정쩡하다 보면 아무 짓도 못하지요.
P. 54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P. 82
"말썽이 생기는 건 질색이에요!" 내가 짜증으로 응수했다.
내가 짜증을 낸 것은, 내 내부의 욕망 역시 암내를 풍기며 지나간 그 탄탄한 몸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썽이 질색이라고!" 조르바가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어디 좀 들어 봅시다. 두목이 원하는 건 도대체 뭔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내가 대꾸하지 않자 조르바가 계속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P. 150-151
그리스도가 나셨소, 우리 현명한 솔로몬이여, 죄 많은 백면서생이여! 세상 잡사 꼬치꼬치 따지지 맙시다! 예수님이 태어났어요, 안 났어요? 물론 태어나셨지...... 그런데 왜 멍청하게 앉아 있어요?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언젠가 기술자 하나가 가르쳐 줍디다) 물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디다. 보고는 못 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
P. 175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P. 317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P. 329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P. 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