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 글

무라카미 하루키와 카버의 눈동자

Zigeuner 2016. 1. 2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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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가와 요코[각주:1]의 에세이집 [요정이 춤추며 내려오는 밤]에 수록된 글입니다.

오가와 요코의 에세이는 국내 소개되지 않은 듯 합니다. 자기가 소설가가 된 이야기들, 상을 받은 후의 소감,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난 후의 독후감 등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언급이 있어 소개해봅니다.


- 그런데 정작 난 하루키 작품도 카버 작품도 기억에 없네요. 안 읽은 건지, 잊은 건지. 몇몇 작품을 분명 읽었는데.


- 문제가 될 경우 내리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카버의 눈동자


개인 전집의 부록에 그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가 아니라 번역가에 대해 적는 일은 아마도 상식을 벗어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레이몬드 카버 전집-무라카미 하루키 옮김]의 경우라면 용인되리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처음으로 카버의 이름을 익히고 '하루키가 옮긴 글이라면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책을 손에 들었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독자 가운데 하나다.


번역자에게 끌려 외국 소설을 읽었던 경험은 지금까지 없었다. 카버뿐이 아니다. 존 어빙도, C.D.B.브라이언[각주:2]도, 리처드 브라우티건도, 그리고 스콧 피츠제럴드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주목한 작가라는 이유로 읽었던 작가들이다. 그리고 언제나 기대가 꺾이는 일은 없었다. 그 작가들은 모두 내게 있어서도 소중한 작가가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없었다면 나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도 [워터멜론 슈가에서]도 모른 채 지냈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다시 한번 그의 중요성에 놀라고 만다. 한정적인 삶 속에서 매우 뛰어나고 진지하며 진실된 소설과 만나게 된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하루키가 데뷔한 이듬해, 나는 오카야마에서 상경,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막 열여덟이 된 나는 아직 소설 한 편도 써본 적 없으면서 무언가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품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표명하고 싶은 것, 윤곽을 드러내고 싶은 것, 힘겹게 다다르고픈 지점이 쓰기 전부터 확실히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을 단어로 바꿔가는 것이 바로 소설쓰기다! 내면에 확실한 것이 보이지 않는 한 아무것도 쓸 수 없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런 옹색한 생각을 산산조각내주었다. 마치 나를 옥죄던 주문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알지 못한다'는 지점에서 태어난 이야기다. 예전에는 분명 존재했던 무언가가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그 공백 속에서 "나"는 '모르겠어'를 반복한다. 사라진 무언가의 정체를 끝까지 확인하려 하지만 조바심을 내거나 이해한 척 하지는 않는다. 그저 조용히 멈춰서서 어렴풋이 남아있는 기운을 느끼며 공백의 밀도가 깊어질 뿐이다.


'모른다'라는 위치에서도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런 용기를, 그에게서 전달받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곧바로 현대문학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거기에서는 매주 독서모임을 열었다. 텍스트로 무엇을 고를지는 완전히 자유. 채택하고자 하는 소설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제안할 수 있었다. 단, 일주일에 완독할 수 있는 분량일 것, 그리고 모두 돈없는 학생들이니 문고로 나와있는 소설일 것, 두 가지가 조건이었다.


하지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문고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못하고 단행본이 독서회의 텍스트로 선정되었다. 그 당시 대학생에게 하루키의 출현은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독서회가 열리는 날, 나는 사사키마키의 그림이 표지에 실린 그 책을 들고 오후 여섯시에 다카다노바바의 르누아르에 갔다. 아직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것저것 메모를 남긴 페이지를 넘겨보면서 주스를 마셨다. 왠일인지 다들 한참동안 오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책을 다시 읽어나갔다. 마침내 책을 전부 읽어 시간이 여덟시에 가까워졌는데도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동아리방 게시판에서 일시와 장소를 잘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무언가 잘못 알아둔 모양이었다. 그 날 독서모임에서 나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그저 혼자 르누아르의 의자에 몸을 걸치고 있기만 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가득 채워져있는 공백감과 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백감이 서로 겹쳐진 듯한 순간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이다. 아기 고양이를 캠프파이어의 장작처럼 쌓아올리는 부부분이나, 잔디를 아주 정성스레 깎는 '나'의 일하는 태도, 알콜 중독 증세를 보이는 아주머니의 말본새, 여자 아이의 방을 관찰하는 장면이 마음에 든다. 여름 햇살이 내려쬐는 곳에서 담담하게 잔디가 깎이고 문득 정신이 들면 가슴 저 깊은 곳에 삐걱거림이 남는다. 그 삐걱거림을 없애는 방법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


카버의 작품 중에서는 [수집가들]이 제일 좋다. 외부에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부조리와 아내가 도망친 무일푼의 남자 사이를 떠도는 찝찝함과 섬뜩함, 기묘함이 짧은 페이지 안에 완벽하기 봉인되어 있다. 그런 느낌이 분출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내부에서 서서히 이어질 뿐이다.


소설이 독자를 향해 격앙되어 공격하는 듯한 일 없이 그저 거칠거칠한 감촉만을 남긴다. 두 사람의 소설에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대해]라는 에세이에서 카버는'작가라는 존재는 때로 멍하게 붙박이처럼 서서 무언가에-석양일수도 있고 낡은 신발일 수도 있는- 시선을 빼앗기는 일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가 텅 비고 순수한 놀라움에 빠지는 일 말이다' 라고 말했다. 물론 사진으로 본 게 다지만 카버의 눈동자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눈동자에도 그 '순수한 놀라움'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별 볼 일 없는 사물이라도 그 안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건져올리려는 집념이 스며 있다.


  1. '박사가 사랑한 수식' '임신 캘린더'등의 작품을 쓴 소설가 [본문으로]
  2. https://en.wikipedia.org/wiki/C._D._B._Bryan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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